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 비극 햄릿이 되다 클로이 자오 신작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요.
그런데 이 위대한 비극이 사실 작가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 먼저 떠나보낸 아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흥미로운 가설이 있습니다.
최근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바로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영화 한 편이 공개되었거든요.
아카데미를 휩쓸었던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의 신작, '햄넷(Hamnet)'입니다.
이름에 담긴 슬픔, 햄넷과 햄릿
이야기의 시작은 16세기 영국, 셰익스피어의 가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그에게는 '햄넷'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햄넷(Hamnet)'과 '햄릿(Hamlet)'이라는 이름이 서로 구분 없이 쓰였다고 하거든요.
아일랜드 작가 매기 오패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 동명의 소설을 썼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불멸의 비극 속 주인공 '햄릿'은 어쩌면 먼저 떠나간 아들 '햄넷'의 또 다른 모습, 그의 영혼이 담긴 그림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클로이 자오 감독은 바로 이 문학적 상상력에 매료되어, 역사와 문학, 그리고 피와 살을 가진 한 인간의 삶을 스크린에 담아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국적을 넘어선 완벽한 캐스팅
이번 영화제 레드카펫에는 셰익스피어 역의 폴 메스칼과 그의 아내 아그네스 역의 제시 버클리가 나란히 섰거든요.
두 사람 모두 아일랜드 출신의, 지금 가장 주목받는 배우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지점인데요.
배우 폴 메스칼이 인터뷰에서 "두 명의 아일랜드 배우와 한 명의 중국 감독이 모여 가장 영국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며 웃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인 조합이지만, 바로 이 '외부인의 시선'이야말로 클로이 자오 감독이 원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국민 상징'으로 신격화하는 대신,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한 명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죠.
광활한 대지에서 좁고 어두운 방으로
클로이 자오 감독하면 '노매드랜드'에서 보여준 광활한 자연과 그 속을 유랑하는 영혼의 모습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석양이 지는 마법 같은 순간, 드넓은 대지를 비추던 그의 카메라는 이번 영화에서 180도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16세기의 나무로 된 방, 어둡고 축축한 숲, 그리고 두꺼운 구름 아래에 가뒀거든요.
"이 영화에는 석양도, 마법 같은 순간도 없다"고 직접 말할 정도였습니다.
한정된 공간이 주는 정적과 불편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오직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이런 답답하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들 '햄넷'을 잃은 부부의 슬픔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슬픔을 마주하는 두 가지 방식
영화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보여주는데요.
아버지 셰익스피어는 그 고통을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런던으로 떠나 위대한 극작가가 됩니다.
반면, 어머니 아그네스는 집과 기억 속에 머물며 떠나간 아들의 흔적을 일상 속에서 붙잡고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거든요.
한 명은 밖으로, 다른 한 명은 안으로 향하는 이들의 슬픔은 우리에게 아주 보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상실'이라는 경험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파괴하고, 또 어떻게 다시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인 셈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비극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빠와 아들이 들판을 함께 뛰놀던 순간, 아내가 부엌에서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던 순간처럼 삶의 기쁨과 따스함이 교차하며 인생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거든요.
우리가 아는 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가 아닌, 한때는 무너졌고 약했으며 깊은 사랑을 간직했던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문학은 가장 깊은 상처에서 피어난다
토론토 영화제 시사회가 끝난 후, 한 관객은 이 영화를 '셰익스피어 가족에게 보내는 한 통의 영상 편지' 같다고 표현했는데요.
그 행간에는 차마 다하지 못한 사랑과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는 평이었습니다.
위대한 예술적 영감이 단순히 천재성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삶의 가장 깊은 상처와 균열 속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클로이 자오 감독은 그녀만의 섬세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햄넷'은 2025년 연말에 전 세계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노매드랜드'의 광활한 풍경에 익숙했던 팬들이라면 그의 변신에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스타일에 갇히지 않으려는 감독의 야심과 새로운 도전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분명 있을 겁니다.
문학의 뒤편에 숨겨진 한 가족의 아픔이 어떻게 가장 찬란한 비극으로 재탄생했는지,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스크린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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