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시나요?
컴퓨터 본체보다 넓었던 모니터,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경쾌하게 울리던 소리, 그리고 “삐~ 삐삐~” 모뎀 접속 소리와 함께 설렘을 안겨주던 파란 화면의 천리안.
1990년대, 컴퓨터가 생소하던 시절, 천리안은 단순한 통신 서비스를 넘어 세상과 소통하고 꿈을 키워나가던 우리들의 뜨거운 청춘의 공간이었습니다.
20대의 저에게 천리안은 세상을 향한 창문이자 꿈을 향한 설렘이었습니다.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친구들과 밤샘 채팅을 하고, 좋아하는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해 열정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ATDT 01421’을 누르고 접속음을 기다리던 그 설렘, 텍스트만으로도 충분히 설레었던 랜선 친구들과의 만남, 때로는 밤샘 채팅으로 밤을 지새우며 수십만 원에 달하는 전화 요금 고지서에 가슴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은 풋풋하고 뜨거웠던 20대 청춘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습니다.
대한민국 1세대 PC통신, 천리안의 발자취
1985년, 한국데이터통신(데이콤)에서 선보인 '비디오텍스' 서비스가 바로 천리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1990년대 초반, PC 통신 서비스로 본격적인 전환을 이루면서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과 함께 대한민국 PC 통신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당시 천리안은 '부르주아의 통신'이라고 불릴 만큼 높은 정보 이용료를 자랑했지만, 그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모뎀 소리, 그 설렘을 아시나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천리안에 접속하려면 전화선에 모뎀을 연결해야 했습니다.
“삐~ 삐삐~” 하는 접속음이 들리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파란 화면에 하얀 글씨로 천리안 로고가 나타나면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그때는 그 속도에도 세상과 연결된 듯한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자료실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한 곡 다운로드하려면 몇 시간씩 걸리기도 했고, 용량이 큰 게임은 며칠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천리안에 열광했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천리안 자유게시판'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뜨거운 토 debate의 장이 되었고, '나우누리 영화 동호회'는 영화 팬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나만의 아바타, 랜선 속 또 다른 나
천리안은 나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워주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직접 디자인한 아바타로 나를 표현하고, 개성 넘치는 글씨체로 나만의 개성을 드러냈습니다.
닉네임 하나에도 나의 취향과 개성을 담아 꾸미고, 때로는 익명성에 기대어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피어난 우정과 사랑
천리안은 단순한 통신 서비스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새로운 정보의 보고였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커뮤니티였으며, 때로는 익명성을 빌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익명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소설을 공유하고, 직접 쓴 글을 올리며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고, 낯선 이들과 밤새도록 세상 이야기를 나누며 때로는 위로를 받고 때로는 공감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천리안 동호회 활동입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실제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등산 동호회에 가입해 주말마다 함께 산에 오르고, 사진 동호회에서 사진 촬영 기법을 배우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천리안은 취향과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였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안녕, 천리안, 그리고 나의 20대여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등장한 포털 사이트들은 화려한 그래픽과 멀티미디어 콘텐츠로 무장하고 기존 PC 통신의 아성을 위협했습니다.
천리안 역시 '심마니' 검색 엔진, '심파일' 자료실 등을 통해 변화를 모색했지만, 결국 PC 통신 시대의 종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서비스는 종료되었지만, 천리안은 단순한 인터넷 서비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곳에는 꿈 많던 20대의 열정과 낭만, 그리고 잊고 있던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안녕, 천리안. 그리고 그 시절, 찬란했던 나의 20대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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